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롤루스 대제/생애 (문단 편집) ===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대립 === 이 당시 [[가톨릭 교회]]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황제에게 종속된 위치였고, 황제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황제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는 [[교황]]의 대리인이 상주하고 있었고 황제가 소집한 [[시노드]] 등 여러 회의에 충실하게 참석하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들도 대부분의 경우 다섯 총대주교[*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중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이 제국의 첫 번째 총대주교이자 다른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랑고바르드족]]의 침입과 단성론, [[성상(조형물)|성상]]파괴령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던 동로마 제국은 이를 저지할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교황에게 랑고바르드족을 매수하고 프랑크족과 동맹하여 랑고바르드족을 막아내라는 권유를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총독부는 살아남았으나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로마를 지킬 힘은 없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직접 로마의 민병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몇 번이나 밀어닥친 랑고바르드족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이슬람]]의 침입은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 사이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응해 [[단성론]] 교파와 정통파 교회의 대립을 극복시키고자 <엑테시스>를 선포하였지만(638) 교황 [[요한 4세]]의 반발만 샀다. 이로 인한 대립은 갈수록 극심해져서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라벤나 총독부에 체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어 반란 선동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크림 반도로 유배 가 거기서 사망하는 사건(655)이 벌어지게 된다. 이는 이슬람의 맹공을 받는 상황 속에서 가톨릭과 척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여긴 동로마 황제들이 단성론을 버리면서 진정된다. 그러나 이 분쟁은 가톨릭이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고, 교황들은 차츰 제국의 간섭을 불편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726년,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내어 진격해오는 이슬람을 막아내고 이사우리아 왕조를 연 [[레온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상파괴령은 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레온 3세가 [[성상(조형물)|성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즉각적으로 그건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교회가 황제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교황은 "속권과 교권은 분리되어야 하며 속권이 교리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거기다. 교황은 이탈리아를 방어하지 못하는 동로마 제국의 무능력을 비난하며 로마 시민들이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교황에 지지를 보이면서 이탈리아 속주는 마비 상태에 빠진다. 교황이 아직 황제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런 마비 상태는 얼마 못 가 풀렸지만 성상 파괴에 대항하는 교황의 반발은 멈추지 않았다. [[랑고바르드 왕국]] 왕 [[리우프란트]]의 거듭된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교황 측에서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만약 새로운 보호자가 등장한다면 교황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보호자에게 보호를 부탁할 만한 분위기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